그 감정들을 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산장에서 예약을 확인하는 연락이 왔다. 그런 연락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산장에 도착했고, 내가 남들보다 많이 늦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산길에 이제 사람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제서야 조금 무서워졌다. 미리 걱정하지 않는 성격은, 드디어 위기가 코앞에 닥쳐서야 걱정을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던 순간에 느낀 그 환상적인 감각들은 그 때만큼은 완전히 잊혀졌다. 어떻게 다리를 움직였을까, 확실하게 기억난다. 눈이 쌓인 비탈길을 걷던 다리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아이젠이 눈을 찍는 그 묵직한 감각이 선명하다. 노을빛이 어땠는지 느끼고 기억하기도 전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드디어 헤드랜턴을 켰다. 이 헤드랜턴을 배낭에 넣을 때도 설마 내가 해가 질 때까지 산장 근처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이 챙겨야 한다니까, 정말 혹시 모르니까 챙겼던 것을 정말로 쓰게 된 것이다.

고도가 높아진 산길은 좁았다. 어둠 속에서 길 양 옆의 키 작은 나무들의 가지가 길까지 뻗어나와 엉켜서 내 시야를 막았다가, 다시 조금 트이길 반복했다. 나뭇가지가 눈 앞에 엉켜 있으면 헤드랜턴의 불빛에 의지해 그것들을 팔로 헤쳤다. 내 몸이 지치긴 했지만 표지판은 목적지인 장터목 대피소가 가까워졌다고 말해주고 있었고, 그것은 나를 큰 걱정 없이 계속 움직이게 해 주었다. 어두운, 눈 쌓인 산길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내가 잘 가고 있다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이정표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했다.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고,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위에 불빛이 보였다. 분명히 대피소였다. 점점 건물이 크게 보였고, 한동안 등산로에서 거의 못 본 사람들도 보였다. 대피소가 있는 평지 위로 올라온 순간, 마치 천왕봉에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다 왔다! 감탄같은 말을 외치며 대피소 앞마당에 섰다.

하늘에 끝이 없었다.

눈 앞으로는 어둠에 잠긴 지리산 자락이 은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검고 부드러운 구름같이. 그리고 그 위로는 어두운데도, 분명 검은 밤하늘인데도 밝게 느껴지는 끝없는 하늘이 그냥, 가득했다. 밤하늘이 이 세상의 전부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은 그저 그 세상의 전부 속의 작은 부분, 아주 작은 부분인 것 같았다. 그 탁트인 밝고 검은 밤하늘이 여기를 완전히 감싸고 있었다.

이 곳을 감싸고 있는 검은 하늘이 밝아보이는 것은 아마 쏟아질 것처럼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 별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그만큼 적절한 표현이다. 쏟아질 것처럼 많은 별. 사방이 트여 있는 곳에서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의 흐름도 잊혀지고 대피소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 멍하게, 광활한 하늘과,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같은 산과, 그 속의 아주 작은 나를 즐겼다. 끝없는 우주에 감싸인 아주 작은 나. 얼마나 편안한가. 정신없이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대피소에 올라왔던 시간의 보상을 그것으로 모두 받았다.


대피소 천장이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다면 좋을텐데. 그러면 숙소에 누워서도 저 검고 밝은 하늘과 쏟아지는 별이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텐데. 눈이 온다면 내 머리 위로 쌓여가는 눈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텐데. 눈 쌓인 대피소 마당에 눕기에는 너무 추웠다.

대피소 안은 따뜻했다. 추운 바깥에서 환상적인 감상을 느꼈음에도 일단 실내의 온기에 마음이 풀어졌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침상은 중학교 시절 극기훈련을 갔을 때 한 방에서 수십 명이 담요를 깔고 붙어 누워 잤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색하게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일단 몸을 눕히니,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깥에 누워버리고 싶다고, 그 환상적인 밤하늘에 둘러싸여 있고 싶다고 생각한 게 몇 분 적인데, 사람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편안하고 안전한 것에 약해진다.

그러나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거의 하루 종일 등산을 했고 내일도 산길을 걸어야 하니 저녁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배낭에서 먹을 것들을 챙겨 공동 취사장으로 느릿느릿 향했다. 취사장의 풍경은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기 속에서 음식을 만들고, 먹는다. 불과 음식의 온기와 사람의 온기가 뿌옇게 뒤섞여 있다. 그것들이 모두 습기와 연기를 내뿜는다. 나는 그 흐리고 습한 공기 속에서 라면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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