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짐을 챙길 때 가져온 떡국떡을 넣고 즉석밥을 데웠다.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떡라면은 정신없이 먹고 밥을 말아먹었다. 평소라면 제법 많을 양을, 그 습하고 흐린 공기 속에서 순식간에 비웠다. 하루 종일 등산을 한 것, 나도 모르게 어두움 속에서 산길을 걸으면서 잔뜩 긴장한 것, 따뜻한 대피소에서 긴장이 풀린 것, 모든 것들이 뒤엉켜 밥을 막힘없이 삼키게 했다. 그제야 알았다. 이 곳의 이 습하고 흐린 공기는, 산을 오르느라 거의 느끼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흔적이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음식냄새, 옆에서 나눠주던 초콜릿바. 나는 몇 시간만에야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 이런 것임을 가득하게 느꼈다. 등산은 자연 속에 있는 것이었다. 차가운 바람과, 눈, 얼음, 햇빛, 밤하늘과 별과 끝없는 산의 물결 같은. 그리고 결국 나는 자연 속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 쉬었다. 등산의 과정이 외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몇 시간을 걸었더니 그 끝에서는 결국 사람들 속에 있게 되었다.

먹은 것을 정리하고 다시 침상에 돌아가 누웠다. 워낙 좁아 배낭을 다리 밑에 깔고, 등산복을 둘둘 감아 머리를 받쳤다. 분명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고, 가까운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간식을 나눠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들이 들렸는데도, 온기와 백색소음과 배부름과 피로가 한꺼번이 몰고 온 잠이 나를 휘감아버린 모양이다.


분명 다른 사람들의 작은 말소리와 바스락거리는 비닐봉투 소리 같은 것들을 들으면서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맞춰놓은 알람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잠에 들었다가 깬 것이다. 허둥지둥 알람을 껐지만, 그 알람이 아니어도 잠에서 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새벽같이 일어나 등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어제 저녁에 공동 취사장에서 받은 초코바를 까 먹으면서 배낭을 다시 챙기고 등산복을 갖춰입었다. 등산스틱을 장갑 낀 손에 들고, 머리에는 헤드랜턴을 쓰고, 등산화에는 아이젠을 채우고. 어제 출발할 때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등산스틱만 든 채였지만, 만 하루 사이에 나는 더욱 무장을 든든하게 한 이틀차 햇병아리 등산가가 되었다.

온기를 등지고 나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껏 찾은 온기를 두고, 등산스틱으로 바닥을 툭툭 찍으면서 대피소에서 나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인공적으로 밝은 대피소의 조명과 사람의 체온으로 따뜻했던 공기에서 막 빠져나온 몸을 한 번에 감싸는, 해발 1650미터의 공기는 신선하게 내 몸을 깨웠다. 밤하늘은 여전히 별빛으로 밝았고, 여전히 산등성이는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 여전한, 어젯밤부터 내내 나와 대피소의 모두를 감싸고 있던 그 밤하늘과 산등성이를 바라보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려면 서둘러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평지에서나 산에서나 걸음이 느린 나는 더욱 서둘러야 했지만 그 순간엔 걷는 것보다 그게 우선이었다.


기껏 따뜻한 대피소에서 나왔는데 온 얼굴과 폐가 새벽의 찬공기로 식혀지고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이미 떠난 천왕봉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용한 새벽 산길에는 바람 소리와, 내가 눈길을 밟는 소리만 난다. 어제 오후에는 바람 소리에 딸랑거리는 얼음 소리가 들렸고, 오늘 새벽에는 바람 소리에 작은 잡목 가지들이 부딪히며 내는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잘그락거리는 소리는 분명 산등성이에서 부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움직이는 흔적이었지만, 내게는 오히려 배경음악같이 들렸다. 새벽에 대피소에서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고 정상을 향해 걷는 나, 이런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배경 음향, 그런 것.

그런 생각은 내 기분을 조금 들뜨게 했지만, 내 걸음이 느려지게 하는 것에도 일조했다. 아직 천왕봉까지는 몇백 미터가 남았는데, 나는 벌써 헤드랜턴을 꺼서 배낭 주머니에 넣었다. 그만큼 어두웠던, 한밤중처럼 어둡되 별빛으로 밝았던 하늘의 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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